posted Feb 20, 2012 9:45 PM by Doyeon Kim
[
updated Feb 20, 2012 9:46 PM
]
이번
수요일(22일)이 교회력으로 보면 ‘성회 수요일’이고, 이날부터 ‘사순절’이 시작된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의 주일을 뺀
40일을 말하는데, 예수님의 고난과 그 속에 담긴 사랑과 구원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기간이다. 전통적으로 성도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로 자신을 절제하며 진지하게 이 기간을 보냈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즐거움과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관심을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두면서 삶의 중요한 것들을
놓칠 수 있다. 가령 주변에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을 소홀히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 사이에서 갈등하기도 있다. 심지어는 너무 분주하게 쫓기듯 사느라고
자기 영의 상태는 생각도 못하고 하루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더욱 진지하게 대면하는 기간이다. 이 거룩한 대면의 시간을 통해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되고 흐트러졌던 것들을 추스리며 그동안 놓치고 있던 중요한 것들을 회복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를 안다면, 사순절은 ‘힘든 고행의 기간’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좀더 집중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참 모습을 회복하는 ‘은혜의 기간’이
될 것이다.
사순절을
여는 첫 날을 ‘성회 수요일’(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로 성스럽게 여긴다. 때에 따라 재를 이마에 바르는 예식을 갖기도
한다. 왜 이마에 재를 바를까? 성경에서 ‘재를 덮는 행위’는 ‘회개’를 상징한다. 욥도 “티끌과 잿더미 가운데서 회개”한다고 고백했고(욥 42:6), 다니엘도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했다(단 9:3). 또한 재를 쓰는 행위 속에는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살수 없는 존재임의 자기 고백’이 담겨있다. 우리는 흙에서 나왔고
흙으로 돌아가야 할 피조물이라는 유한한 존재임을 상기할 때, 창조자 하나님을 겸손히 바라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하고 의미있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사순절의 첫 날 이 고백을 진지하게 하면서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사순절을 시작하게 된다.
우리는
성회 수요일 새벽부터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를 시작한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과 자기 고백을 가지고 새벽을 깨우기 위함이고, 사순절의 기간
동안 기도를 위해 새벽마다 잠자는 육신을 깨우는 거룩한 습관을 갖기 위함이다. 개인적 QT와 새벽기도회를 병행하는 것이 처음에는 부담일 수 있지만, 사랑과 생명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인만큼 예비된 풍성한 은혜가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해주시리라 믿는다.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주님의 고난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동참할 수 있을지. 기꺼이 내 즐거움의 한 부분을 내려놓고 그만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기로, 주님의 고난을
더욱 깊이 묵상하며 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내기로 결정하자. 이 기간만큼은 매일 새벽을 기도로 깨워보겠다고
결심해보자. ‘삶’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헌신을 작정하기 전에,
이번 ‘40일부터’ 주님께 드려보자.
‘마음을 새롭게 하는’ 작은 변화부터 시작해보자.
- 조현준 목사 |
posted Feb 12, 2012 9:02 PM by Doyeon Kim
두 주 전부터 계속 머리 속에 아른거리는 단어가 있다. “경건의 모양.. 경건의 능력.”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것 같다. “경건의 모양은 있는 것 같은데, 경건의 능력은 어떠니?” 내면과 삶을 살펴보았다. 자신이 없었다.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런데 한 편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모습을 지금 살피게 하신 것은 회복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며칠 후부터 기도에 대해 자꾸 마음이 쏠렸다.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그 능력. 사실 모르는 바가 아니다. 아니, 너무 흔해버린 내용이다. 그런데 기도만 떠올리면 가슴 벅차오르는 느낌을 주시면서 더욱 마음과 시간을 쏟도록 이끄신다. 이런 자각과 느낌을 새롭게 주시는 시점, 기도에 더욱 깨어있도록 이끄시는 시점이 절묘하다.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를 준비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도의 평안과 즐거움, 그 능력에 새로이 눈뜨면서, 약속대로 우리 곁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는 기회가 되길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바라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소망이 절실하다. ‘경건의 능력’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다 이어지는 생각은 ‘맛 잃은 소금’이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힌다고 했는데(마태 5:13). ‘맛 잃은 소금’과 ‘경건의 모양만 남은 상태’를 생각해보니 떠올려지는 모습들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만 하고 그 능력은 경험하지 못하는 모습, 기도가 중요한 줄은 알지만 진지하게 기도하지도 않고 기도를 경험하지도 못하는 모습,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들어보기는 했지만 누리며 살지는 못하는 모습..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한 이스라엘 때문에 속상해하신 하나님의 고통이 사실 지금도 계속 되고 있지는 않는지. 작년에도 그러했듯이 올해도 우리에게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는 ‘이벤트’가 아니다. 특별 순서도 없고 출석 체크도 없다. 하나님을 열망하는 사람, 하나님을 더욱 진지하게 찾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 기도로 새벽을 깨우는 시간일 뿐이다. 이 시간을 통해 경건의 모양 속에 경건의 능력이 채워지길, 맛 잃은 소금 속에 본래 하나님의 백성다운 맛이 회복되길 소망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렘 29:11-13)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 7:7-11)
- 조현준 목사 |
posted Feb 6, 2012 8:40 AM by Doyeon Kim
옛날에 게으르기로 소문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 날도 역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밭으로 일하러 가고, 그 게으른 농부만이 텅 빈집에 남아 하루 종일 빈둥거리고 있었습니다. 나른한 오후, 언제나처럼 대청마루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소린가 싶어 농부는 게슴츠레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환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간 큰 도둑이 담을 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농부가 잠결에 들은 소리는 바로 도둑이 낡은 담장을 타 넘으면서 떨어뜨린 벽돌 소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도둑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농부는 다시 스르르 잠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어어, 도둑이네... 저놈, 담장을 넘어 마당에 들어오기만 해봐라” 중얼거리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내 다시 “쿵”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농부가 다시 힘겹게 졸린 눈을 떠보니 도둑이 담에서 뛰어내려 마당을 슬금슬금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농부는 다시 무겁게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며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집안으로 들어오기만 해봐라...” 농부가 깊이 잠든 줄로 안 도둑은 살금살금 집안으로 들어와 농부의 옆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농부는 잠에 취한 채 속으로만 중얼거렸습니다. “저놈이 안방으로 들어가네... 뭘 가지고 나오기만 해봐라...” 얼마 후 도둑은 안방에서 값이 나갈 만한 물건들을 한 보따리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대문 쪽으로 부지런히 걸어갔습니다. 게으른 집주인은 대문을 열고 나가는 도둑의 뒷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잠꼬대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이놈, 다시 오기만 해봐라...” (김남준 목사의 ‘게으름’ 중에서) 이것이 동화이기만 할까요? 우리의 마음과 삶을 조심스럽게 살펴볼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지 않습니다. 말씀을 ‘영의 양식’이라고,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귀찮습니다. 움직이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일을 위해 지금은 쉬어야 할 때라고 정당화합니다. 게으른 자라고 해서 그의 혀까지 게으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게으른 자일수록 핑계가 많고 변명이 그럴 듯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들을 물리치십시오. 경건함에 이르도록 몸을 훈련하십시오.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 (딤전 4:7-8,새번역) ‘경건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몸에 익숙한 패턴이 아닌 새로운 패턴에 따라 의도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수고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새 패턴에 몸이 익숙해지기까지 나의 의도와 수고가 계속될 수 있는가”가 관건입니다. 여기서 경건에 대한 ‘막연한 바램’과 ‘열망’이 구별됩니다. 크리스챤이라면 누구나 ‘경건의 능력’을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훈련을 감내할만한 수고와 열망이 필요합니다. 그 열망은 하나님을 향한 내 마음을 보여줍니다. 올해 사순절은 2월 22일부터 시작합니다. 올해도 그날 새벽부터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몸을 움직이는 ‘수고’로, 그 수고가 하나님과의 ‘영적 비밀’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조현준 목사 |
posted Feb 6, 2012 8:38 AM by Doyeon Kim
‘하나님의 임재’는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임에도 개념적 차원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이 부분에 관한 실천적 훈련과 삶에 대해서는 로렌스 형제가 탁월하다. 평생 하나님의 임재에 관해 묵상하고 훈련하면서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조언들을 주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의 영성 훈련의 초점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하나님께 깊이 뿌리내리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약속대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초점 맞추는 연습’으로 나아가려고 하는데, 여기서 로렌스 형제가 제시하는 방법은 매우 큰 도움이 된다. 특별히 오늘은 “하나님의 임재 연습”(두란노) 중에서 ‘잠언’ 편 여섯번째 격언: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방법’을 소개한다.
1. 첫 번째 단계는 새생명의 단계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피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하나님의 임재를 꾸준히 연습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불안이나 다른 문제들에 휩싸이지 말고 언제나 부드럽고 겸손하게, 그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3. 영혼의 눈은 언제나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바깥 세상에서 뭔가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때는 특히 더 주의해야 합니다. 이 연습을 숙달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모되므로 한두 번의 실패에 결코 낙심해서는 않됩니다. 이것도 하나의 습관이기 때문에 몸에 배기까지는 쉽지 않지만 한번 습득되고 나면 거룩한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생명의 근원이요 몸의 다른 모든 지체들을 지배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시작이요 끝이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은 우리의 모든 영적, 육체적 행동들의 시작이요 끝입니다. 더 넓게 말하면 마음은 우리네 인생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의 시작이요 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 하나님께 집중해야만 하는 것도 바로 이 마음인 것입니다.
4. 이 연습을 처음 시작할 때 사랑에서 우러나오는짤막한 기도의 말들, 예컨대 “주님,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주님의 뜻대로 저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등과 같은 말들을 사용하여 고백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헤매거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 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시선을 못박아 두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연습을 해야만 합니다.
5. 이러한 연습은 처음에는 지속되기가 어렵겠지만, 일단 신실하게 연습이 되면 우리 영혼에 엄청난 영향력을 구사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쏟아 부어지게 하며, 언제 어디서나 순전하고 사랑에 찬 시선으로 주님의 임재를 바라볼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는 것이야 말로 가장 거룩하고 가장 견고하고 가장 수월하고 가장 효과적인 기도의 태도입니다.
- 조현준 목사 |
posted Jan 24, 2012 1:56 PM by Doyeon Kim
성도들과 함께 성경을 읽어가는 것은 항상 큰 즐거움이다. 말씀 속에 흐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나누면서, 여러 사건들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고 그 성품들이 서로 어울려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이미지들을 나누면서, 그리고 기발하고 엉뚱한 질문들을 함께 고민하면서, 그 자리를 인도하시며 각 성도들의 생각과 마음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해결되지 않은 많은 질문들이 때로는 궁금함으로 때로는 꽤 도전적으로 표현될지라도 그 모든 것은 불신이나 불경건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고 열망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부터 ‘성경개관반’(8기)이 시작되었다. 성경공부반으로 처음 만나는 새 얼굴 11명이 모였다. 젊은이들부터 환갑을 훌쩍 넘은 분들까지, 권사부터 이제 막 교회에 발을 들인 분까지 구성이 매우 다양했다. 다양할수록 기대된다. 주어진 질문에 ‘신앙 연륜이 묻어나는 정답’부터 ‘기상천외한 대답’이 함께 모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선한 질문과 대답은 항상 분위기를 새롭고 다채롭게 만든다. 어떤 질문들이 쏟아질지, 그리고 그들이 성경을 읽고 생각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만나시고 깨닫게 하실지 심히 기대된다. 일년 전에 꽤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지던 사람들이, 반년 정도 지나 다른 성경반 과정에서 비슷한 질문을 꺼내는 사람들에게 나서서 말씀을 변호하듯 자기가 깨달은 내용을 설명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바뀐 당사자나 그 변화를 옆에서 지켜본 모두가 함께 즐거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과정들을 보면서 우리는 말씀이 사람을 바꾼다는 것, 말씀이 우리 마음과 신앙을 풍성히 한다는 것, 말씀이 우리 현실을 새롭게 보게 만들고 소망을 갖게 한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바쁜 중에도 시간을 만들어 말씀 앞으로 나아가 경건의 시간(QT)을 갖는 이유다.
[오늘 설날잔치 합니다!]
우리 민족은 바쁘고 쉽지 않은 삶 속에서도 감사와 흥겨움을 아는 민족이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조상을 기억하고 어른들께 세배한다. 어른들은 덕담을 건네고 세뱃돈까지 주면서 따뜻하고 넉넉한 분위기를 만든다.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이 맛난 음식들을 나눠먹고 함께 흥겨운 놀이를 한다. 한민족의 역사적 상황을 볼 때 참으로 힘들고 고달픈 인생이었을텐데 감사와 따뜻함과 흥겨움을 놓치지 않은 모습에서 민족적 자부심을 갖게 한다. 오늘 우리는 친교부 주관으로 ‘설날 잔치’를 한다. 잊혀지기 쉬운 어른 공경을 위해 ‘세배’도 하고, 흥겨운 ‘윷놀이’ ‘제기차기’ ‘공기놀이’도 한다. 올해는 현대 감각에 맞추어 ‘가족사진’도 찍어준다고 한다. 푸짐한 선물도 있다고 한다. 가족 모두에게 특히 한국 문화와 정서에 낯설 수 있는 아이들에게 매우 의미있고 즐겁고 넉넉한 시간이 될 것이다. 신앙적인 면 외에 한국의 전통까지도 놓치지 않고 나누려는 모습은 분명히 우리교회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 조현준 목사 |
posted Jan 17, 2012 1:30 PM by Doyeon Kim
“God, give us grace to accept with serenity the things that cannot be changed,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which should be changed, and the Wisdom to distinguish the one from the other.”
미국의 현대 신학자로 유명한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의 기도문은 살면서 자주 생각해 볼만 하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나님,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은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우리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우리가 변화시킬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는 일에 대해서 공연히 불평하고 그것으로 인해 쓸데없이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린 채 속상해 하고 괴로워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키가 작다는 것, 피부색이 검다는 것, 얼굴 생김새가 마음에 안든다는 것.. 이런 것들은 우리가 고민하고 투덜거린다고 해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의 평정만 잃게 하고 삶을 어둡고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영국의 George 5세는 이런 좌우명을 걸어두었다고 한다: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달의 세계나 엎지러진 우유에 대해 울지 않도록 가르쳐 주소서.” 이처럼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 그것을 평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만이라면 충분하지 않다. 그의 기도문은 다음의 문장으로 이어진다. “내 힘으로 고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까지도 포기하고 체념하는 것은 결코 용기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힘으로 해낼 수 있고 고칠 수 있는 일인데도 힘들기 때문에 쉽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포기하고 운명의 탓으로 돌려버린다면 그것은 현실 도피일 수 밖에 없다. 쉽게 포기하고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의 도움만 구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일 수 없다. 하나님의 동행과 약속을 의지하고 여호수아처럼 여리고성을 향하여 다윗처럼 골리앗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 신앙적 용기이기 때문이다. 쉽게 포기하고 물러서는 사람은 한 달란트를 받았으면서도 그것으로 아무 것도 하려 하지 않은 채 그냥 땅에 묻어버린 어리석은 종과 다를 바 없다. 그에게 돌아간 것은 호된 책망 뿐이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기도문의 세 번째 문장이다: “이 두 가지 차이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기에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구별하는 것, 우리가 마음의 평정을 가지고 순응해야 할 현실과 우리가 용기를 가지고 고쳐야 할 현실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중요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기도문과 함께 마지막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가지 차이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
posted Jan 17, 2012 1:28 PM by Doyeon Kim
[
updated Jan 17, 2012 1:29 PM
]
오늘 예배는 임원헌신예배로 드립니다. 새해를 시작하며 임원들이 먼저 하나님께 헌신하며 순종의 선봉에 서기 위함입니다. 헌신하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말씀과 환경 등을 통해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일들에 마음이 분주하여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주의깊게 듣는 일을 등한히 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들에 순종할 때, 진실로 하나님을 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는 하나님을 알아요!’라고 말하면서 그분이 명령하신 것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그에게는 진실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순종해야만,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 주는 방법이 됩니다." (요일 2:3-5, 쉬운성경)
오스왈드 챔버스의 충고를 소개합니다.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한가지 음성을 확실하게 들었다고 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다 알아듣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향하여 내 마음과 생각이 무디어져 있다면 이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내가 나의 친구를 사랑하면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주에 주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셨습니까? 만일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인 줄 깨달았다면 나는 의식적으로 그 명령을 불순종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그분의 말씀을 듣지도 않을 정도로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한번도 말씀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합니다.
우리의 영적 삶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의 간구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요 11:41). 만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면 언제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할 것입니다. 꽃과 나무와 주의 종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내게 전합니다. 그러나 나는 다른 뭔가에 사로 잡혀서 그 메시지를 듣지 못합니다. 즉 하나님의 음성을 안 들으려고 하기 보다는 나의 마음이 다른 곳에 빼앗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말씀하더라도 우리는 세상의 일들과 봉사 활동 및 자기 확신등에 사로 잡혀 그분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주님의 자녀들의 자세는 언제나 “주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듣는 헌신된 마음을 개발하지 못하면 우리는 어떤 특별한 때에만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때는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마음이 사로잡혀서 전혀 하나님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주의 자녀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 조현준 목사 |
posted Dec 31, 2011 2:50 PM by 앤아버한인연합감리교회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중 하나가 ‘찾아오셔서 새 일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이다. 이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출애굽’일 것이다. 이 사건의 배경은 ‘애굽에 매여있는 이스라엘’이다. 여기서 성경이 보여주려는 핵심들은 다음과 같다: 1) 당시의 이스라엘은 애굽에 매여 고생했다. 2) 스스로 상황을 해결할 힘이 없었기에 미래가 절망적이었다. 3) 고생하는 그들의 처지를 하나님께서 아셨고, 그래서 사랑과 능력으로 그들을 찾아가셨다. 4) 그들의 상상 너머의 일들을 통해 해방시키시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은 ‘그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만드신 ‘그 분’이다.
출애굽 사건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마음과 능력은 이스라엘 멸망이후 ‘바벨론 포로 귀환 사건’에서 한 번 더 반복, 강조된다. 여기서의 배경은 ‘바벨론에 매여있는 이스라엘’이다.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려는 내용은 출애굽 사건의 핵심들과 놀랍게 일치한다. 고생스럽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 하나님께서 찾아가셔서 그들을 해방시키시고 새 역사를 시작하신다는.
출애굽 사건과 바벨론 포로 귀환 사건은 하나님의 매우 중요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분의 이미지가 중요한 것은, 이분께서 새로운 해방의 역사를 시작해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신약 메시지다. 신약의 배경은 ‘죄에 매인 인류’이고, 내용 또한 출애굽이나 바벨론 포로 귀환 사건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같은 분이 만들고 열어가시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 구약과 신약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고, 바로 이분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문 두드리고 계신다고 전하고 있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사건은 지금 우리를 찾아오셔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시려는 그 분을 설명하는 서론 격이다. 이제 그분의 본론 격의 역사를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서 일으키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 귀환의 역사를 우리의 삶 속에서 다시 재현하시길 원하신다. 해방과 새로운 역사의 시작!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두드리시는 이유이고, 2012년 새해를 열며 우리가 집중해야 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고, 우리가 잡아야 할 가장 중요한 손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보고 배우면서 실수를 줄인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의 모습과 실수들을 본다.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것이 있다. 이스라엘의 관심이 언제나 ‘문제 해결’에 있을 때,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의 변화’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 변화를 위해 하나님은 상황과 문제들을 적절히 사용하셨다. 존재가 변화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 사람의 평화의 근거가 상황이 아니라 ‘약속대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시편 23편이고, 하박국의 기도다. 하나님께서 목자이시니 푸른 초장에서도 사망의 골짜기에서도 안전할 수 있었다(시 23:1-4). 그 분께서 함께 계시니 열매가 없고 가축이 없어도 기쁠 수 있었다(합 3:17-18).
문제는 ‘처한 상황’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하느냐’다. 이것이 새해를 열며 우리가 살필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우리를 찾아오신 ‘임마누엘’ 하나님이 새해를 여는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다.
- 조현준 목사 |
posted Dec 25, 2011 11:10 AM by 앤아버한인연합감리교회
찬송가 489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왜 이렇게 말할까? 크고 작은 문제들과 씨름하며 살면서 알게 되는 것이 있는데, ‘처한 힘든 상황’보다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그 상황에서 밀려오는 ‘두려움’이라는 사실이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것들을 상상하며 ‘막연한 두려움’때문에 힘들어한다. 마치 100미터 경주 직전에 느끼는 심리적 압박감처럼.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 그 동안 받은 하나님의 복을 세워보는 것. 그 과정에서, 그 동안 바쁘고 분주해서 놓치고 있었던 하나님의 손길을 만나게 된다. 나를 이끄시고 상황을 인도하시는, 여러 모양으로 복 주신 바로 그 손. 그 손을 의식하면서 우리는 감사를 회복하게 되고 이 상황에서 내가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게 되고, 이것이 믿음을 갖게하고, 신앙인답게 처한 상황을 대처하게 만든다.
‘신명기’는 모세가 이스라엘 출애굽 2세대에게 전하는 율법인데, 강조하는 것이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지켜 행하라’. 율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율법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강조되는 또 하나가 있는데, ‘기억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는지 어떻게 광야에서 지키셨는지 기억하라고 강조한다(신 5:15, 7:18-19, 8:2, 8:18, 11:2, 15:15 등).
왜 그러시는 걸까? 발등의 문제와 씨름하는데도 힘과 시간이 부족한데 왜 자꾸 이러시는 걸까? 그 동안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서 하신 일들을 기억하면서, 지금 약속대로 내 곁에 함께 계심을 떠올리게 되고, 내가 이 상황에서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게 되고, 그 인식이 처한 상황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때 시 23:4 말씀이 나의 고백이 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의 인식은 매우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바로 이것이 ‘받은 복을 세어 보라’는 메시지의 의미이고, 우리가 한 해를 정리하고 또한 새해를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점검해야 할 부분이다. 성경이 계속 반복하여 우리에게 외치는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인생은 한없이 외롭고 힘들다. 그 단적인 모습이 ‘길 잃은 양’이다. 반면에 하나님 의식은 믿음을 만들고, 유명한 다음의 고백을 하게 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합 3:17-19)
처한 상황보다 우리의 인생에 훨씬 더 큰 영향을 주는 변수가 있다. 그것을 확인해야 한다.
- 조현준 목사 |
posted Dec 9, 2011 5:20 PM by 앤아버한인연합감리교회
지금까지 25년을 목회하면서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왔다. 한국 시골에서 만난 순박한 사람들, 군대에서 만난 장교와 사병들, 태국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들, 미국 아이오와 그리고 오하이오 교민들.. 많은 분들을 만나고 함께 어우러지면서 그만큼 삶이 풍성해졌다. 지금도 눈 감으면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들. 하나님의 큰 축복 중 하나가 ‘만남’임을 실감한다.
그 동안 경험해온 목회지들과 비교할 때 앤아버는 특별하다. 이제 일년 반도 채 안되었지만 오자마자 느낀 것은 ‘목회자들 간의 친밀함’과 ‘교회들 간의 긴밀한 연합 사역’이었다. 지역적 특성이나 선배 목사님들의 헌신 등 여러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여름성경학교’(VBS)를 연합으로 하는 것은 오랜 구상이었는데 건강하게 진행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지난 10월에 있었던 ‘연합부흥회’도 사실 걱정이 많았다. 유명 강사를 모셔도 잘 안모이는 게 현실인데, 지역교회 목회자들이 돌아가며 말씀을 전한다면 얼마나 모일까.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자리가 없어서 로비에까지 서서 말씀을 듣는 모습들이 감동을 넘어 놀라움이었다. 앤아버, 참 재밌는 동네다.
지난 주일 저녁에 있었던 ‘연합 찬양제’도 그 분위기의 연장이었다. 성서교회가 메어졌다. 많이들 뒤에 서서 찬양을 들어야 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유모차까지 동원해서 참석한 모습들이 너무 귀하게 보였다.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안고 업고 찬양을 듣는 모습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진정한 경건과 거룩을 느꼈다. 아이들의 합주가 어설픈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따뜻하게 웃어주고 박수치며 격려하는 분위기가 연주회가 아닌 ‘잔치집’ 같았다. 때때로 흔들리는 음정이라도 한껏 웃으며 찬양하시는 어르신 찬양단이 좋았다. 맞다. ‘고품격 연주회’보다 ‘하나님 앞에 함께 모여 기뻐하는 잔치집’이 더 맞기 때문이다. 모두 다른 교단의 성도들이어도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날 그 자리에 모인 이유가 같고, 기뻐하는 이유가 같기 때문이다.
시작하는 첫 부분에서 함께 기도했다. 찬양하는 사람이 아닌 예수님만 드러나게 해달라고. 한 마음으로 함께 찬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래서인가보다. 기도는 멋지게 응답되었고 흥겨움과 서로에 대한 배려들이 자리를 더욱 풍성하고 신나게 했다.
자수를 해야겠다. 예수님만 드러나게 그래서 돌아갈 때는 예수님만 생각나도록 기도했지만, 사실 우리교회 식구들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참느라고 혼났다. 왜 그리 훤칠하고 모두들 잘났는지. 찬양은 어찌 그리 잘하는지. 우월한 유전인자 때문인가. 찬양을 들으면서 혼자 별 생각을 다 했다. 분명히 연합성가대인데, 그 중에서 우리교회 식구들의 얼굴을 찾아보며 흐믓해했음을 고백한다. 그 표정들과 소리가 다 예뻤다. 이러면 안되는데, ‘연합’ 정신에 어긋하는데 하면서도. 이게 혹시 군중 속에서 자기 자식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부모의 초능력의 일종일까. 주책맞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억누르며, ‘연합’의 대의 속에서 찬양의 본질에 집중하기 위해 꽤 애쓴 밤이었다. 하나님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의 사람들때문에 행복했다.
- 조현준 목사 - |
|